경이롭고 아름다운 성령의 임하심을 매일같이 경험하고 살아가는 나 홀로목사입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은 나 홀로목사의 이 말을 얼마나 실감하고 살아가는지 모르겠지만 나 홀로목사는 그야말로 매순간을 신의 숨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떤 분들은 나 홀로목사의 이 말에 속상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은 고생에 찌든 삶을 살아가며 힘든 나날을 보내는데 속편한 소리를 한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그런 분들에게 한마디 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는지 모르겠지만 나 홀로목사역시 물질적 삶으로 보자면 그다지 풍요롭고 평탄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직업을 봐도 그렇게 편한 직업을 가진 것은 아니지요.
신을 경험하고 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할지라도 고통스러움이 없다거나 즐거움만 가득한 것은 아니며 다만 일반인들과 다른 면은 고통조차 신의축복으로 보는 겁니다.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뿐이지요.
알고 보면 모든 이들이 나 홀로목사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신의숨결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단지 못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과 나 홀로목사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지난시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성령이신 빛이 함께하고 있음을 알았고 하나님이 무한한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알았던 거지요.
그런 만큼 여러분과 나 홀로목사의 차이는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으며 각자가 맡은 역할만이 다를 뿐입니다.
세상기준으로 보자면 대통령과 거지의 차이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자면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각자가 하나님이 주신 재능에 따라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지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이며 이미 그러한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시간의 예수님말씀은 천국을 갈 수 있는(영생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말해준겁니다.
첫 번째 열 처녀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과 같은 영적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었고 두 번째는 달란트의 비유였는데 각자의 재능에 따라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기름부음을 받은(성령과 함께하는)이를 돕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했지요.
간혹 이런 말을 듣고 어떤 분들은 상당히 화를 냅니다.
오랜 세월동안 깨달음을 얻은 스승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어떤 영적체험도 없었고 오히려 전보다 못해진 것 같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나 홀로목사는 할 말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연이 다르며 인식정도역시 다른데 어떻게 꼬집어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경적으로 보자면 해줄 말이 있습니다.
만약 깨달음을 얻은(기름부음을 받은)이가 절대적인 능력이 있어서 세상어느 누구에게도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생존당시에 모든 이스라엘사람들은 영생을 얻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공격하였으며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마 이 말을 듣는 누군가는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시간 우리들이본 성경내용에는 여기에 대한 답이 있었습니다.
열 처녀 모두가 등을 들고 있었다는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담아져있다는 말이며 우리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아무리 깨달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합니다.
모두들 보신대로 예수님께서 기적과 이적을 보여주었지만 많은 이들이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공격을 퍼부었지요.
그런 일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각자의 몸 안에 신의품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스승을 따르거나 종교를 믿어서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인연 때문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 홀로목사가 여러 차례 말했듯이 영적인 스승의 역할이란 깨달음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는데 있는 것이지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오늘날의 일부 크리스천들이나 불교도들의 생각처럼 그들이 신통방통한 능력이 있어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살아있는 동안 그들과 인연 있는 모든 이들을 깨닫게 만들거나 그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어야만 합니다.
영적스승의 역할이란 성령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일뿐 성령의 불꽃을 꺼트리거나 피울 수 있는 이는 믿음을 가진 개인이지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예수님을 비롯하여 영적스승이 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하게 되면 반드시 실망을 하게마련입니다.
이런 이유로 일찍이 부처님은 자신을 손가락에 비유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왜 보는가?”
우리들이 성령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육신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허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나 석가모니 부처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과거와 마찬가지의 구태를 벗지 못한다는 거지요.
과거에는 십자가에 못을 박았지만 오늘날에는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심하게 반대하거나 욕을 퍼부을 겁니다.
앞서 실망하신 분처럼 사이비교주라고 욕을 하거나 등을 돌리게 되지요.
그분이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분자체가 가지고 있는 평상시 종교관 때문이라 할 수 있으며 인식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성직자들이나 영적스승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럴 경우 과감하게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면 됩니다.
이 세상 모든 일들은 인연으로 인해 엮어지고 만들어지며 소멸해갑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수없이 반복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의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윤회의 과정이며 우리의 진아(眞我)인 성령의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신말씀은 모두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혹자(或者)는 이런 말을 듣고 또다시 반론을 제기(提起)할겁니다.
세상사람 누구나가 영생을 얻길 원하며 천국에 가기 좋아하지 어떻게 윤회하는 것을 좋아하며 지옥 가는 것을 즐겨하겠냐 말하겠지요.
모두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심어져 있다면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영적스승을 해칠 수 있느냐는 말씀도 할 겁니다.
그런 분들에게 한 가지 되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천국을 가보았거나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마도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목사님들께 물어보면 성경의 여러 구절을 예로 들며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겠지요.
하지만 성경어디에도 천국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으며 비유로서 말해놓았습니다.
그저 걱정근심이 없고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곳 정도로 묘사되고 있는데 구태여 말해보자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할 수 있겠군요.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막17:20)
And when he was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예수님말씀에 따르면 모든 사람 안에 천국이 있다했으니 각자가 생각하는 천국이 따로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하시지 않고 비유로서만 말씀하셨으며 너희 안에 있다 말씀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올곧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야기한가지를 하겠습니다.
어떤 독실한 크리스천이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살아생전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보고 싶어 하나님께 간청(懇請)을 드렸지요.
딱 한 달간만 세상에 있는 친구를 데려와 함께 지내도록 해 달라 청하자 하나님은 흔쾌히 허락하셨고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처음에는 걱정근심이 없고 조용하기만 한 천국의 일상에 감동을 받고 좋아하던 친구가 열흘이 지나고 나자 제발 세상으로 내려 보내 달라 졸랐다고 합니다.
왜냐고 물어보니 너무나 심심해서 못 살겠다고 했지요.
술 담배도 없고 여자도 없으며 놀 거리라고는 없으니 날이 갈수록 지옥같이 느껴졌던 겁니다.
결국 그 친구는 더 이상 천국에 살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물론 이이야기는 비유의 말이며 정말 있었던 이야기는 아니겠습니다만 생각해볼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어쩌면 혹 누군가는 또다시 항의하겠지요.
천국이란 누구든지 모두 좋아하는 곳이지 어떤 이는 좋아하고 어떤 이는 싫어하는 곳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 분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누군가 준다면 그것을 당신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사과를 좋아하고 딸기를 싫어하는데 누군가 딸기를 준다면 그곳이 과연 천국이라 할 수 있을는지요.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천국이란 마음 안에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알아본 결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거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곳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곳이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과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천국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이란 영생의 하늘인데 그러한 영생은 우리들의 지금과 같은 인식으로 갈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과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천국이 같을 수 없는 것은 우리들이 아직까지 육적인 인식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공격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을 갈 수 없는 자들로서 인식이 영생을 얻기에는 모자랐던 거지요.
진정한 천국이란 분별심이 무너진 상태의 인식으로 갈 수 있는 곳이며 너와나의 경계가 허물어져야만합니다.
이와 같은 말은 성경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있지요.
함께 보실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3:2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같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 된 존재들의 눈에는 선악이 하나로 인식된다는 말이며 선악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나무 주변에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지킨다는 말은 선악의 경계가 무너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험을 넘어서야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시간 예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의 육신으로서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 단언(斷言)하다시피 하셨지요.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24:22)
결국 예수님과 같은 영적스승들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해 주는데 있는 것이지 물질을 바치면 천국에 갈 수 있다 가르치러온 것이 아닙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스승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의 내면에서 성령을 완전히 드러낸 분으로 사람들에게 자신내면에 성령이 함께 있음을 말해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 남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지는 않지요.
그런 분을 따라가면 그야말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두 번째로 영생을 얻는 방법이 달란트에 대한 비유였는데 그다지 어려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지금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각자의 재능에 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잘났던 못났던 하나님이 주신 재주껏 살고 있지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자신의 삶에 만족을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사회제도의 문제나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성토하지만 결국 그러한 사람들이 제시하는 문제해결방법이란 표면적일 뿐 근본적으로 이세상이 한꺼번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세상은 어느 한사람이 잘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거나 어떤 문제한가지를 해결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과거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일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때 독일에서는 갑자기 분유 값이 치솟았는데 이 때문에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데모를 했고 히틀러를 찾기에 이르렀습니다.
분유 값이 너무 비싸 아이를 키우는데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니 분유 값을 내려달라는 말에 히틀러는 흔쾌히 승낙하고 그 당장 분유 값을 내리라 지시를 했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분유회사가 들고일어났습니다.
분유 값을 내릴 테니 우유 값을 내려달라 요구했으며 그에 따라 또다시 히틀러는 우유 값을 내리라 지시를 했는데 이번에는 축산농가에서 대모를 했습니다.
사료 값 때문에 우유 값을 못 내리겠으니 사료 값을 내려달라 했고 또다시 사료업자들은 또다시 건초를 공급하는 농민들을 원망하였으며 농민들은 또다시 비료업자를 비료업자들은 또다시 원자재 업자 탓을 했으니 결국 히틀러도 손을 들고 말았지요.
일제 강점기를 지나오면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살펴보면 어떤 대통령도 완벽하지 못했으며 득실(得失)과 공과(功過)의 차이는 있을망정 완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상대방에 대해 공격의 화살을 쉴 새 없이 날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동조하며 판세를 자신들에게 유리한쪽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이 같은 일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일에 휩싸여 상대방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행위를 잘하는 짓이라 말하기도 어렵지요.
예수님말씀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이 가진 재능을 십분 발휘하라는 말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포함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상대방을 향해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절대 성경적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비판이라는 말은 상당히 좋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판의 목소리가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비판할 수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현재모습에서 탈피하기위해서는 기존의 관념(觀念)이 무너져야하는지라 비판의 목소리는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그 비판의 목소리가 상대방을 향한 것이기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상대방을 비판하는 만큼이나 자신에게도 비판적일 수 있을 때 비판은 자성(自省)으로 이어지며 자신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여기에 대해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
For with what judgment ye judge, ye shall be judged: and with what measure ye mete, it shall be measured to you again.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4)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5)
목적이 어디에 있던지 남을 비판(심판,judgment) 한다는 것은 자신이 비판받을 짓이라는 말씀이며 자신의 성찰(省察)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비판하는 것은 위선자의 행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적용시켜보면 함부로 남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낼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달란트에 대한 비유의 말씀과 지금의 예수님말씀에는 어떤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있을는지요.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세상사람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각자의 재능을 부여받았는데 그들의 행동에 대해 우리들이 이런저런 판단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달란트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기도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 성령이 담겨있다는 말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재능을 부여받았다는 말은 마찬가지로 볼 수 있지요.
똑같은 이치로 사람들안에 성령이 들어있음을 안다고 한다면 함부로 심판하거나 단죄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도 됩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하는가 하겠지만 영생을 얻으려는 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남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불가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깨달은 부처의 눈에는 부처 아닌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영생을 얻은 사람의 눈에는 성령이 담겨지지 않은 그릇은 이 세상에 없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달란트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름부음을 받은(성령과 함께하는)이를 돕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한 말씀을 분석해보겠습니다.
우리들이 이미 성경을 통해 알아본 결과 예수님이 육신으로서 재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밝혀졌지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성령이신 예수님이 임하게 되어있으며 특히나 성직자들이나 목회자들에게는 성령의 힘이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크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에너지의 법칙에 의해서 이러한 일은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말을 믿지 않겠지만 여러분삶속에서 이와 같은 일들은 누구나 발견할 수 있지요.
아무리 사이비종교의 교주라 해도 영적인 이야기를 할 때면 영적인 에너지가 주어지기마련이며 타락한 교회의 목사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워 기도할 때만큼은 그 힘이 옵니다.
그래서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마찬가지로 영적인일에 관심이 많고 영적인 사람들과 접촉을 하게 되면 영적인 에너지가 주어집니다.
다소 불협화음이 발생되더라도 교회나 영적인 모음에 간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는 거지요.
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지난시간의 예수님말씀은 분명하고 명백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되새기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더 보고난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25:31)
When the Son of man shall come in his glory, and all the holy angels with him, then shall he sit upon the throne of his glory: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 했으니 영생을 얻은 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서두에 말해놓았습니다.
이렇게 미리 말해놓은 이유는 예수님처럼 성령이 드러나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얻은 이를 돕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성령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한 겁니다.
이 내용을 빌미로 많은 영적스승들이나 목회자들이 자신을 돕는 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기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마태복음25장 31절의 말씀을 완전하게 숙지를 해야 하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살펴봐야합니다.
나 홀로목사의 주변에는 많은 분들이 스스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큰소리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미 영적인 체험을 했고 성령(빛, 소리)과 하나 됨을 경험했다고 말하며 자신을 도우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분들에게 한마디 해드리겠습니다.
착각에는 커트라인이 없으나 오만방자에는 한도가 있으니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곧 떨어질 겁니다.
조금 심했습니까?
하지만 이런 분들은 꿈에서 깨어나야 함으로 좀 더 심하게 꾸지람을 받아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면 절대 타인들로부터 도움을 요청하거나 신세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높은 자리에서 내려올 수가 있으며 더 큰 낭패를 당하지 않게 된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냥 말하면 나 홀로목사 개인의 생각일 뿐이라 할 것이 분명하니 예수님말씀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적어도 하나님과 하나 되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사람들로부터 헌금을 요구하거나 자신을 도우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영적스승들이나 성직자들이 금품을 요구하거나 자원봉사를 하도록 만들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역시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삼28:6)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삼28:7)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삼28:8)
보시다시피 사울은 영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신접한자들을 내쫒아 놓고서 다시 그들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결여(缺如)되었음을 보여주지요.
6절 내용을 보면 이미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왜 사울이 버림받아야만 했을까요.
성경을 통해 확인해본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삼상10: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삼상13:8)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삼상13:9)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삼상13:10)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삼상13:11)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삼상13:12)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삼상13:13)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삼상13:14)
이 내용을 제대로 알려면 사무엘상, 하편을 모두 읽어봐야 하지만 지면이 한정된 관계로 간단하게 몇 구절만 올렸습니다.
여러분각자가 꼭 한 번씩 읽어보시기 바라며 예문에 집중해보겠습니다.
선지자사무엘은 사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데 둘 사이에 약속한 일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비유의 말로서 사울이 영의 일보다 육적이고 세상적인 일에 관심을 기우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이란 단순하게 사울의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변인이자 하나님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사무엘이 칠일동안 기다리라해 놓고 나타나지 않았으니 사무엘의 잘못이겠지만 이 내용은 그런 뜻이 아니라 사울이 인간적인 면이나 세상적인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해놓은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사무엘이 올 때까지)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번제를 드린 일)를 따랐다는 말이며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때를 택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영적스승이 타락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경우는 왜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에 임명받았을까요?
이 역시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삼26:23)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삼26:24)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삼26:25)
몇 번에 걸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했지만 그때마다 사울을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습니다.
액면으로 보면 다윗이 바보 같겠지만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지요.
다윗은 인간적인 면 보다는 영적인 것을 더욱 중하게 여겼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것이며 인과응보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다윗의 인식정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비록 자신의 원수라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성령과 하나 됨, 그리스도)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다윗의 깨달음정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지요.
성령과 하나 된 눈으로 보면 원수의 내면에도 성령이 담겨있음을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몇몇 분은 사울은 그저 이스라엘의 왕이었을 뿐 영적스승은 아니었다고 말할 겁니다만 23절을 보면 분명하게 여호와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역시 영적인 스승이었다는 것을 25절을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가 있는데 비록 타락한 스승이었지만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성령이 임하여 말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데 이제는 다윗의 복을 빌 뿐 아니라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축복의 말까지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사울이 아니라 내면의 성령이 임하여 말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오늘 여러분들은 아주 중요한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영적스승이라 할지라도 타락할 수 있으며 형편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일에 관여를 많이 할수록 영적인 세계와는 멀어진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지요.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영혼이 나락으로 떨어질 일은 없겠지만 그 육신은 살아있는 동안 징계를 받게 되어 있으며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미 몇 차례나 성경을 통해 확인했듯이 성령이 담겨있지 않은 육신은 있을 수 없으며 심지어 삼라만상 안에 모두 들어있습니다만 성령과 단절시킨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자신임을 알아야합니다.
나 홀로목사 주변에는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몇몇은 자신의 체험에 대한 자신감으로 계율을 함부로 어기며 살고 있지요.
아직까지 신으로부터 징계가 오지 않는지라 안심을 하는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서 웃기는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보다 높은 멜기세덱의 반차에 오른 다윗조차도 육신으로 지은 죄로 인해 징계를 받아야했는데 자신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자신의 등급이 높아서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그분은 자신의 체험이 정말인지부터 점검해봐야 합니다.
정말 자신이 체험으로 성령과 하나 되어 삼라만상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면 함부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세상법도 함부로 어기지 않을 겁니다.
본인은 못 느끼고 있겠지만 나 홀로목사의 눈에 그분은 이미 빛이 어두워져 있는 것이 보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고 있음을 본인만 모르고 있지요.
나 홀로목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고 있다는 말이며 주위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던 존경심이 떠났다는 말입니다.
가끔씩 목회자들이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길 자신들을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며 일반신자들이 심판할 수 없다합니다만 잘못 알아도 크게 잘못알고 있습니다.
일반신자들이라 하지만 그들 안에도 성령이 들어있는지라 하나님이 그들을 이용하여 심판을 하시는데 그들이 등을 돌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하길 징계가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본인이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벌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외형적으로는 평온할지 모르지만 내적으로 성령과 단절되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나 홀로목사는 생각만 잘못해도 하나님이 징계를 하십니다.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말을 듣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 했으니 징계도 즐겁게 받아들이겠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은 분명 저주겠지만 하나님이 잘못을 그 당장 씻을 수 있게 징계해주셨음을 축복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지 저주자체가 즐겁다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 저주가 즐거운 일이라면 더 이상 저주가 아니지요.
육신을 가진 사람인이상 누구나 실수는 하기 마련이며 그러한 실수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보았다면 그것은 분명 죄입니다.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많은 이들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깨닫게 되면 육신으로 완전해진다생각하지요.
그러나 성경을 통해 확인했듯이 육신으로 완전할 자는 없습니다.
멜기세덱의 등급에 오른 다윗조차 하나님으로부터 수없이 징계를 받아야했으며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을 낮추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이 찬양받아 마땅한 것은 그리스도일 때이며 그리스도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수천 년 동안 존경받는 이유는 성령으로 하나 된 멜기세덱의 등급에 올랐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은 일을 고려(考慮)해 볼 때 우리들이 영적스승을 어떻게 대해야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영적스승을 돕는다는 의미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숭배하거나 도울 때 육신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성령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면 그를 돕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숭배하고 돕는 것이 되는 겁니다.
꼭 영적인 스승뿐만이 아니라 성직자를 비롯하여 목회자는 물론 심지어 일반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 안에 성령이 함께하는 것을 인식하고 돕는다면 마찬가지의 결과가 오게 됩니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들이 성령과 하나 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거지요.
사실 구약의 내용이 너무나 중요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었습니다만 지면관계상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가 구약의 내용을 반드시 읽어보시길 바라며 나 홀로목사의 성경연구는 여기에서 쉬어가겠습니다.
세상에 많은 장사치들이
서로 자신의 물건이 좋다고 말을 하듯이
세상의 많은 종교가(宗敎家)들 또한
자신의 종교가 유일한 진리의 길이라 말하는구나.
어떤 물건에 대한 가치기준이라는 것이
그 물건이 얼마나 필요한가에 따라 달라지듯이
종교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 또한
개인의 믿음정도에 달렸으니
자신의 종교가 진리의 길이라 떠드는 것보다
자신의 믿음이 확고히 자리할 수 있게
내면을 다지는 것이 먼저일지니
외적으로 향한 시각을
내적으로 모으고 조용히 기도를 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