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피 흘림에 대한 의미를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전서를 인용하여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주장하셨는데 과연 그러한지 살펴볼까 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1:2)
Elect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through sanctification of the Spirit, unto obedience and sprinkling of the blood of Jesus Christ: Grace unto you, and peace, be multiplied.
이 내용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들에게 편지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예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하나님의 예지에 따라 선택되었다고 했으며(Elect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성령으로 신성하게 되었다고 말한 겁니다.(through sanctification of the Spirit)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피 뿌림과 순종하는 이들에게 은총과 평화가 증강되라는 말은 있지만 피 뿌림을 얻으라는 말은 없습니다.(obedience and sprinkling of the blood of Jesus Christ: Grace unto you, and peace, be multiplied)
이것이 중요한 것은 이미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는데 불구하고 또다시 피 뿌림을 얻어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앞부분에 성령을 통하여 신성하게 된 것과 뒷부분에 그리스도 예수의 피 뿌림과 순종이 동일하다는데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예수의 피 흘림에 대한 의미가 성령을 통해 신성하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피에 대한 해석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피는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아니라 생물을 살게 하는 생명을 뜻하며 곧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을 가리키는 거지요.
이렇게 인식하면 빛이신 성령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피를 뿌리는데 비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모세시대에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고 한 것은 담긴 뜻이 따로 있는 것이지 액면대로 받아들일 내용이 아닙니다.
현시대의 기독교인들조차 모세시대에서 행해지던 유월절 행사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구약의 내용은 비유된 가르침으로 봐야합니다.
만약 성경 내용을 액면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으면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은 기록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예수생존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내용을 액면대로 받아들여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행위들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구약을 읽어본 이들은 아시겠지만 모세가 기록한 구약에는 죄 사함에 대한 의식으로 새나 짐승에게 죄를 전가하여 죽이는 일이 행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해마다 사람들이 이러한 의식을 통해 일 년 동안의 죄 사함을 받고 새롭게 일 년을 살아가는 반복된 생활을 했던 거지요.
모세가 이렇게 율법을 세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한번지은 죄를 씻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반복적으로 이 같은 일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인가 육신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빛이신 성령이 내안에서 되살아나야함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하지만 이 같은 죄 사함의 방식은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영원하지도 않고 자신의 본모습인 성령을 깨닫기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요한이나 예수님 같은 분들은 이 같은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당시로서는 혁신(革新)적인 가르침을 펼쳤던 겁니다.
모세시대에는 한 마리의 양이나 염소가 한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지만 성령이 드러난 예수님은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모세시대에 사람들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게 만든 것은 피에 대한 뜻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인데 이 시대에도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는 곧 생명을 뜻하며 생명은 하나님의 숨결이자 성령입니다.
성령은 곧 빛이고 시공간이 무너진 영의 세계에서 영원히 존재합니다.
이것은 내가 사사로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and the darkness comprehended it not.
1절에 기록된 말씀은 사물의 본질을 뜻합니다.
삼라만상을 하나님이 지으셨고 모든 것들은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태초에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한거지요.
2절에 그는 진동을 의인화시킨 것으로 하나님과 동일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했으며 진동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3절)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야기이므로 내가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동가운데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4절)
결국 생명은 빛이고 빛은 성령이며 피가 생명을 뜻한다고 했으니 피는 곧 성령과 동일하다는 등식이 성립하게 됩니다.
이 말씀인즉 사람 안에 빛이신 성령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사람은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말하는 빛은 성령을 가리키고 어둠은 사람의 육신을 가리키는 겁니다.
빛은 반드시 어둠이 있어야 빛을 발할 수 있기에 육신을 가진 사람은 빛이신 성령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한 것은 육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각이 육신에 머물고 있기에 가시적인 것들만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인식의 폭이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영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이해할 수 없다 말해놓은 겁니다.(the darkness comprehended it not)
이렇듯 베드로 역시 빛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생명이고 빛이신 성령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세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점을 알아야합니다.
짐승에게 죄를 전가하여 죄 사함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또다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그 또한 좋은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모두 가져갔다 생각하고 또다시 죄를 짓지 않고 살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는 거지요.
하지만 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육신을 가진 이상 이렇게 살수는 없으며 죄를 물마시듯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예수가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되살아나게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다른 이는 모르겠고 나는 예수님의 피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 죄를 짊어져본 이들은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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