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때리는 자와 맞는 자가 둘이 아니다.

배가번드 2023. 10. 31. 04:11
728x90

사람이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사람 입장이 되어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입장이 바뀌어도 전혀 개선이 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더욱 사람을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포클레인 업에 종사할 때 이런 일을 경험했지요.

당시에 나와 함께 일하던 사장님은 어렸을 때 포클레인을 배웠다고 했는데 무보수에 가깝게 일을 배웠으며 숱하게 얻어맞아가면서 배웠다는 겁니다.

어린나이의 친구들을 데려다가 혹사를 시키는 변명을 하기위해 자신의 과거를 들먹였던 것인데 속으로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이 그렇게나 힘들게 배웠으면 이제는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배울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5대의 포클레인을 경영하면서 사장님 본인과 기술자 1명을 제외하고는 초보자들을 운전사로 고용하고 있었던 것은 월급을 아끼기 위해서였지요.

본인은 경영을 잘하고 있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보기에는 사람들을 혹사시키고 있었으며 업장을 쌓고 있다 여겨졌습니다.

결국 산사태가 일어나 사람이 죽는 바람에 포클레인 일을 접게 되었지만 이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얼마나 사람이 이기적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던 셈입니다.

며칠 전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도 이러한 점은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형에게 맞았다는 사람과 동생을 때렸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점을 또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겁니다.

형에게 맞은 분은 나름 형을 용서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고 동생을 때린 분은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 아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정말 속 깊은 반성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습니다.

맞은 이는 때리는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고 때린 이도 맞는 사람의 심정을 제대로 헤아리지는 못하더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맞거나 때리는 일이 생기는 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러한 상황이 연출되기까지의 과정이 있다는 거지요.

맞고 때리는 일이 발생되는데 까지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일일이 말할 수는 없지만 이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그림이 나오고 저사람 입장에서는 또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맞는 사람의 억울한 심정도 때리는 사람의 자신행동을 합리화 시키려는 마음도 그 나름의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시시비비를 따져보면 잘못도 없이 맞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기분에 못 이겨 때린 사람도 있겠지만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없이 맞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전생에 내가 맞았다면 이생에서 되갚아 주려할 것이고 이생에서조차 누군가를 억울하게 때렸기에 맞는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셨지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But I say unto you, That ye resist not evil: but whosoever shall smite thee on thy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And if any man will sue thee at the law, and take away thy coat, let him have thy cloak also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5:41)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2)

 

39절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악마에게 대적하지 말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ye resist not evil)

악령에게 사로잡힌 사람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흔히들 이 내용을 두고 기독교인들의 믿음 상태를 점검하거나 시험하려들지만 알고 보면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가 만약 전생에 누군가를 때려서 이번 생에 맞는다고 가정할 경우 빚을 갚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전생에 맞았기에 이번 생에서 때린다고 생각하는 경우 자신도 모르게 윤회의 쳇바퀴 속에 머물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맞은 것에 대해 북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성령과는 반대되는 악령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고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전생의 일을 들먹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내밀라고 말했던 거지요.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계속해서 윤회를 할 사람이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겠지만 성령과 하나 되어 영생의 하늘로 올라갈 사람은 그와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40절에서 송사를 해서라도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것을 주라 말했으며 41절과 같이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베풀라는 말을 했습니다.

또한 구하는 자에게 주라고 했으며 빌리고자 하거든 거절하지 말라 했지요.(42절)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가 주거나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은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봐야할 점은 내게 무엇인가를 빌리러 오거나 요구한다는 것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겁니다.

과거 전생이 되었건 이생이 되었건 인과의 연결고리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며 은원관계가 해소되어야할 필요가 있기에 찾아온 거지요.

그렇기에 거절하지 말고 주라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깨어난다는 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당연히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19:17)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19:24)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19:25)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

But Jesus beheld them, and said unto them, With me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이 내용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부자가 천국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19장내용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자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는가를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만이 선하다고 대답하셨고(17절) 구원은 사람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얻게 만든다고 대답하셨습니다.(26절)(With me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이 말씀인즉, 성령을 깨닫게 되면 부자와 거지의 신분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왕국에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본체가 빛으로 된 성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바늘귀보다 더 작은 구멍으로도 통과할 수가 있으며 우주를 감싸 안을 수도 있지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돈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가소로운 일인 겁니다.

 

때리는 이와 맞는 이가 둘이 아님을 느끼는 자는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