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도를 깨우치면 사통팔달이 된다.

배가번드 2023. 11. 1. 04:12
728x90

흔히들 나 같은 사람을 보고 도 닦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채식을 하고 명상을 하며 세상일보다 영의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이렇게 말을 하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도를 닦고 있습니다.

도(道)는 말 그대로 길을 뜻하며 모든 사람들이 길을 걸어가듯이 인생길을 걷고 있음으로 당연히 도를 닦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자신들을 구도자(求道者)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막상 누군가 도를 닦는다고 말하면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자신들을 일반인들과 동일시 여기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나타내며 본인들만이 선택받은 사람이라 여기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알고 있던 모르고 있던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도를 닦고 있습니다.

다만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닦는 사람이 있고 천국을 향해 도를 닦는 사람이 있는 것뿐입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분류하자면 육신의 평안함과 풍요로움을 위한 도를 닦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생을 향한 길을 닦는 사람이 있다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육신을 위해 도를 닦는 것이고 영적인 길을 걷는 이들은 영혼을 위한 길을 닦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도(道)의 완성(完成)을 일반적으로 도통(道通)했다고 말합니다.

도가 통했다는 말은 모든 길과 연결이 되었다는 말로서 득도(得道)의 경지를 뜻하는 거지요.

이 말은 곧 모든 길이 서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이며 도 아닌 것이 없다는 말과도 같은 겁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면 일부 기독교인들은 펄쩍뛰며 반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율법에 어긋난다고 여기기 때문으로 자신들만이 유일한 길을 선택했다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유일신에 대한 생각은 달라집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이45:5)

I am the LORD, and there is none else, there is no God beside me: I girded thee, though thou hast not known me: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저런 신을 믿고 있다 생각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할지라도 띠로 매어져 있다고 했으니(I girded thee, though thou hast not known me) 내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마치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닦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헤매며 돌아다닐지라도 그 또한 길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20:38)

For he is not a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all live unto him.

 

보다시피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담겨있지 않은 육신은 없으므로 당연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라 하신 이유를 알아야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은 자는 육신으로 죽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이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자신 안에 영혼이 있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하나 된 이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all live unto him)

이러한 점을 볼 때 모든 사람 안에 성령이 있음을 모르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영생을 얻었다는 말이며 성령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것인데 하나님처럼 사람을 볼 수 없다면 거짓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아직도 모든 사람들안에 성령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새롭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에 대해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좋아할 일도 아닙니다.

본인의 영혼을 본 일도 없으며 영혼에 대한 가르침을 믿지도 않는데 사후에 어디로 갈 건지를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우리가 사후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3:20)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Who knoweth the spirit of man that goeth upward, and the spirit of the beast that goeth downward to the earth?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3:22)

 

본능에 충실하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산다면 짐승과 하등 다를 바가 없지요.

이렇게 되면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혼은 짐승처럼 아래로 내려갑니다.

땅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goeth downward to the earth) 높은 영의 세계로 올라가지 못함을 표현한 것으로 영혼이 저급한 단계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영적으로 완성된 이들은 영생의 하늘로 올라가지요.

구약속의 많은 선지자들이 모두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얻어 빛의 몸인 성령으로서 천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마17:1)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17:3)

 

높은 산에 올라갔다는 것은 의식의 최고 높은 봉우리를 뜻합니다.

6은 부활의 숫자로서 성령이 깨어났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묵상을 통해 높은 의식세계를 경험한일을 이렇게 기록한거지요.

그렇기에 빛의 몸인 성령을 보게 된 겁니다.(2절)

모세는 BC15세기 인물이며 엘리야는 BC9세기 인물입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6백년이라는 세월이 놓여있으며 예수님과는 각기 1500년과 9백년의 차이가 납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한꺼번에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은 빛의 영역이 어떠한 곳인지를 깨닫게 만듭니다.

빛은 곧 성령이라 했으니 성령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생의 하늘에 올라간다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시공간이 무너진 영의 세계에서는 수천 년의 세월은 찰나에 불과합니다.

그러하므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거지요.

이미 몇 차례 말했듯이 도를 통하게 되면 사통팔달이 됩니다.

성경 식으로 표현하자면 성령을 깨닫게 되면 열국을 발아래 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 눈에 모든 이가 살았다는 성경말씀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도가 통한다는 것은 길의 경계가 상실된다는 뜻으로 성령과 하나 된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내 눈에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며 죽은 척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깨어났지만 자는 척 하는 이들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