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돈이 많아도 사용해야 내것이다.

배가번드 2025. 6. 25.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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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아무리 많은 돈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이 사용할 수 없으면 내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부동산을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다 해도 본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그 또한 자신의 것이라 볼 수 없는 거지요.

이세상의 법칙이 이러할 진데 하늘의 것은 더욱 이러합니다.

성령은 누구에게나 내재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깨어나게 만들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누군가는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하고 다른 누군가는 경험을 못할 뿐 아니라 성령의 불씨를 전달해주는 이를 몰라보는 걸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겸손하지 못하거나 영생을 상속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위 말하는 사이비종교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도 본인의 업식(業識)으로 인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이러한 말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다 같은 교회를 다닌다 할지라도 모두가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점을 볼 때 이 같은 말은 틀린바가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한다고 해서 모두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요 모두가 영적인 사람이라 볼 수도 없는 거지요.

모든 것은 본인의 믿음에 달린 일이라는 말씀을 드리며 13장의 마지막 문을 열겠습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갈1:18)

Then after three years I went up to Jerusalem to see Peter, and abode with him fifteen days.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1:19)

But other of the apostles saw I none, save James the Lord's brother.

 

게바는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 그 뜻은 ‘바위’이고 베드로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냥 베드로라고 말하면 될 것은 이렇게 말해놓은 것은 담긴 뜻이 따로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했듯이 성경에 언급되는 숫자에는 뜻이 담겨 있지요.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바위와 같이 강력한 믿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고 육신을 성전 되게 만들었다는 뜻이며 십오일이란 완전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 10(1×10=10)과 은총을 뜻하는 5의 합일의 숫자입니다.(10+5=15)

그래서 19절에서 야고보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 한 겁니다.

야고보(야곱)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로서 성령을 가리킵니다.

즉, 육신을 성전 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강력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아마도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액면대로 받아들여 다른 사도들이 전도활동에 나섰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고 말하겠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면 바울 개인의 일상을 기록한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럴 것 같으면 성경을 상고하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며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깨닫고 거듭나게 만드는데 성경의 목적이 있으므로 이러한 해석이 타당합니다.

바울역시 이러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갈1:20)

Now the things which I write unto you, behold, before God, I lie not.

 

그냥 일상을 적어놓은 것 같으면 이런 말을 할 까닭이 없지요.

자신이 말한 내용이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울의 이러한 의도(意圖)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갈1:21)

Afterwards I came into the regions of Syria and Cilicia;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갈1:22)

And was unknown by face unto the churches of Judaea which were in Christ:

 

수리아의 뜻은 ‘높은 곳’이고 길리기아의 뜻은 ‘돌을 굴린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강격한 믿음과 높은 인식을 갖춘 이들에게 성령(바울)이 임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유대교회들이(the churches of Judaea) 바울을 얼굴로서 인식하지 못했다고(was unknown by face) 한 겁니다.

이 말씀인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과 같은 사도를 육신으로 인식하지 않고 성령으로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사람을 볼 때 내재하신 성령에 초점을 맞추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갈1:23)

But they had heard only, That he which persecuted us in times past now preacheth the faith which once he destroyed.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1:24)

And they glorified God in me.[KJV]

And they praised God because of me.[NIV]

 

이 말씀은 바울의 과거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의 현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면 바울의 과거와 같은 짓을 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지요.(23절)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표본삼아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뜻에서 이러한 말을 남긴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24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 안에서(성령으로서의 바울) 하나님을 영광되게 한다 했습니다.(they glorified God in me)

한글 성경은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했지만 영어성경 어디를 봐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으며 [NIV]성경은 나 때문에(because of me)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한다(they praised God) 기록하고 있지요.

영어성경 모두가 바울이 성령과 하나 됨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갈라디아서 1장 전체 내용은 성령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봐야 합니다.

성경 내용의 어느 것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으며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곧 구원이요 영생인 겁니다.

어떤 목사님은 성경을 쥐어짜면 예수의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했지만 나 홀로목사가 보기에는 성경을 펼치기만 해도 빛이신 성령이 불꽃처럼 터져 나옵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의 눈에 이러한 빛이 보이기를 기원하며 1장의 막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