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

배가번드 2025. 10. 29.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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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설교를 듣다보면 내가 걸어왔던 구도의 길과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해외 선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말씀하실 때면 참으로 힘든 일들을 겪었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 같은 경험을 통해 믿음을 키워왔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수마(睡魔)와 싸우기 위해 지붕위에 올라가는가 하면 금욕과 금식을 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은 대부분의 구도자들이 동일하게 겪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내가 해보았기 때문에 그분들의 마음과 생각이 어떠할지를 알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 모두는 진정으로 구도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도박이나 술 담배에 찌들어 사는 가짜 수행자들은 경험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도자에게 시험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수행을 한다고 볼 수 없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말하기는 어렵다고 봐야하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1:24)

So he drove out the man; and he placed at the east of the garden of Eden Cherubims, and a flaming sword which turned every way,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fe.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지막 관문인 빛을 통과해야 하기에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빛이신 성령을 불 칼에 비유하고 순수한 영을 뜻하는 케루빔을 말해놓은 것은 한 점의 죄가 없는 맑은 영혼이 되어야한다는 뜻에서 입니다.(빛이신 성령을 깨달아야함)

그러므로 우리가 구도의 길에서 시련과 시험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을 과감히 이겨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할 것은 이러한 시험을 겪고 나면 물질적으로 풍요가 주어지고 육신적으로 편안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득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부터 진정한 사도(使徒)가 되고 스님이 되어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이 됩니다.

인자가 세상에 자신을 대속 물로 내놓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러할진대 편안히 앉아서 풍요로운 삶을 즐기며 영생을 얻었다 말한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직 과정에 있는 사람일뿐 결과를 얻었다 볼 수 없으며 더욱 겸손해야만 합니다.

아직 종교의 벽에 갇혀있고 너와나의 경계에 머물고 있다면 빛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며 자신을 세상에 대속 물로 내놓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겁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스님이 탁발(托鉢)을 오면 시주(施主)를 할 수 있어야하고 불교도 또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줄 마음가짐이 되어야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물론 억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이러한 일이 이루어 져야 한다는 말이며 궁극적 목표점이 하나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라야 진정으로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 같은 말은 내가 사사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Therefore the Lord himself shall give you a sign; Behold, a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사7:15)

Butter and honey shall he eat, that he may know to refuse the evil, and choose the good.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 했으니 세상법도를 넘어서있는 성령이 태어난다는(거듭남)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세상과는 별개인 빛의 세계를 알아야한다는 것을 비유로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임마누엘로 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이므로 당연히 내재하신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육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항상 영적인 것을 선택하며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러함으로 아직도 종교의 벽에 갇혀있거나 사람을 분별의 눈으로 본다면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이러한 내말을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막상 현실에서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때 자신이 어떠한 반응을 하는지 살펴보면 내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독교인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중 스님이 탁발을 나왔을 때 어떻게 대할지를 보면 그분의 영적 디그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십중팔구는 자신이 하나님 믿는다는 핑계로 스님을 돌려세울 것이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잘못된 행위라고 볼 수 있지요.

하나님 자녀가 아닌 이가 없고 하나님 숨결이 담겨있지 않은 곳이 없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한다는 것은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목사님이 자신의 집을 방문하면 하나님이 축복을 한 것이고 스님이 가게를 방문하면 저주 받았다는 생각으로는 성령과 함께 한다 볼 수 없습니다.

이 같은 행위는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는 인식에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성령과 하나 되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래서는 임마누엘과 예수가 같은 인물이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며 엉긴 젖과 꿀을 먹는다 말할 수 없지요.

조금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이런 이들은 아직 기복신앙의 행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 봐야하며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본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저 하늘에 있는 예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라 생각하는 이상 성령과 우리는 언제나 둘이 되는 겁니다.

성령과 하나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동시에 우리 안에도 계신다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집니다.

내안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너에게 만도 아니며 우리 안에 계신다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되며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됩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조차 하늘과 내안에 동시에 거하시는 성령이신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될 때 우리는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진정으로 겸손해 질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다는 말씀을 드리며 물러갑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