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종교를 가진 사람의 비율은 40%라고 합니다.
그중에 개신교가 17% 불교가 16% 천주교가 6%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며 기타 종교가 나머지 10%를 나누어 가진다고 볼 수 있지요.(2021년 겔럽조사 참조)
그런데 생각 밖으로 국민의 60%가 비종교인이라고 하는 점이 놀랍습니다.
또한 종교인들 중 20대의 비율이 20%로 가장 낮고 60대 이상이 59%로 가장 높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지요.
이러한 점을 볼 때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영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으며 인생의 종착점에 다가서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걱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은 무려 60%의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중에는 먹고 살기 급급하여 종교를 생각할 겨를도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한번쯤 믿어보았다가 실망하여 돌아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도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며 종교를 가지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다는 거지요.
사람이 믿던지 말든지 상관없이 사람 안에는 신의 품성이 담겨있으므로 모든 것은 신의 안배라고 보면 됩니다.
성경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이신 성령이 삼라만상 안에 담겨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며 불교식으로 말하면 삼라만상 안에 불성이 담겨있다는 말입니다.(처처불상, 사사불공)
그렇지만 내면 깊숙이 자리하는 신의 품성이(성령) 드러나기 위해서는 무척 많은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은 단한 번의 인생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수없이 많은 생을 되풀이 하며 사는 것이며 그 마지막에 도달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이러한 일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영원한 해탈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같이 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지 않겠지만 윤회는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영생도 기독교만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수차례 말했듯이 성경에는 영생을 상속받는 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의 행적을 통해서도 윤회를 엿볼 수 있습니다.
흔히들 예수 그리스도를 갈릴리 가버나움 출신이라 말하기도 하고 나사렛 예수라 말하기도 하지요.
나사렛의 뜻은 ‘초소, 망루’이고 가버나움의 뜻은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은 ‘위로하는 자’라는 뜻이며 갈릴리의 뜻은 ‘원, 순환, 고리’입니다.
이러한 점을 대입하여보면 예수는 높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가 사람들을 위로하기위해 이땅으로 돌아왔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누군가 영생을 상속받은 사람이 예수 같은 구원자를 만나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생에서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로 볼 수 없으며 그 자체만으로 영생을 상속받는 행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누군가는 어려서부터 영적인 길을 걷는 것이며 누군가는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이생을 마감하게 되는 거지요.
만약 사람이 윤회를 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자신의 선택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자신생각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압니다.
심지어 예수를 목숨처럼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마음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들끼리도 반목하며 전쟁까지 벌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기가 막힐 일이지요.
성경을 연구하다 알게 된 일이지만 이슬람교에서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시조라고 알려져 있으며 추앙받는 인물인데 신약에서 바울은 물리쳐야할 대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같은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종교를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같은 생각은 무려 30년 가까이 영적인 단체에 몸을 담고 살아온 결과 얻은 것으로 하루아침에 얻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음 명상과 채식을 시작할 때 그저 심심해서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권유로 인해서도 아니었으며 호기심에 의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무려 두 달 동안이나 고민을 한 끝에 결정을 했으며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마음을 먹은 후에 목숨을 걸고 나선길입니다.
오죽하면 잘나가던 사업이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겠습니까.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 미쳤다고 말하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멀쩡한 정신에서 내가했던 기도였습니다.
육신의 자유의지로는 할 수 없었기에 이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기도로 인해 망하고 난후에 일어난 일은 육신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또한 더욱 큰 행복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지켜보는 이들은 알 수가 없었겠지만 영적인 체험들이 이 시간에 가장 많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내가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러한 체험들이 주어졌다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생각이 많으면 눈을 감고 명상을 할 수가 없으며 앉아 있기조차 힘듭니다.
무려 세 시간 가까이 눈감고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떨 때는 한두 시간 자는 것과 먹는 시간외에 온종일 명상만 하며 지낸 적도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은 경험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지복감은 그들만의 특권입니다.
이러한 일은 명상가들만 체험하는 것은 아니며 다수의 많은 종교인들도 경험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기도원에 들어가 단식과 기도를 하는 거지요.
이러한 까닭으로 나 같은 경우 누구든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선택을 하라 권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길도 좋다는 말이며 그러한 선택은 하나님의 축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고 살아가며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종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통해 위안을 얻으므로 그렇지 못한 비종교인들보다 불평과 불만이 적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산에서 범을 만났을 때 피할 수 있는 나무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아야할 것은 나무가 멀리 있어서는 안 되며 항상 가까운 곳에 있어야 됩니다.
언제든지 내가 피할 수 있는 위안처가 되어야 하며 위로 받을수 있어야 하지요.
이러한 까닭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눅17:20)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24:23)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
누가복음 내용과 마태복음은 내용이 다른 것 같지만 같은 뜻입니다.
자신 안에서 하나님 왕국을 발견해야하며 그리스도가 되살아 나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다음말씀은 우리 삶에서 적용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18: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고 크게는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 말할지라도 실천이 안 된다면 위안처를 제공 한다 큰소리 칠 수 없는 노릇이며 본인의 위안처조차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아는 자는 행동한다는 말씀을 드리며 일요일 예배를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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