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안식을 갈망하면 빛을 발한다.

배가번드 2025. 8. 25.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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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求道者)의 삶은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진리를 탐구하느라 바쁘고 도달하게 되면 임무가 주어지게 됨으로 바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영적인 길도 이러한 점에서는 동일하며 부단(不斷)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득도(得道)는 돈오돈수(頓悟頓修)보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어울린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

한번 깨닫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The light of the body is the eye: therefore when thine eye is single, thy whole body also is full of light; but when thine eye is evil, thy body also is full of darkness.

 

눈을 하나로 만들면(when thine eye is single) 전체 몸이 빛으로 가득할거라(thy whole body also is full of light) 했으니 빛이신 성령을 영접하여 지혜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한거지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점을 볼 때 예수께서는 득도를 하여 지혜안이 열린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시간관계상 예문으로 올리지는 않았지만 누가복음 11장 앞부분에는 예수를 가리켜 솔로몬보다 크고 요나보다도 크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육신적으로 누가 누구보다 크다는 말이 아니라 빛이신 성령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나의 기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한 겁니다.

그렇다면 요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필요가 있으므로 잠시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욘1:1)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욘1:2)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1:3)

But Jonah rose up to flee unto Tarshish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went down to Joppa; and he found a ship going to Tarshish: so he paid the fare thereof, and went down into it, to go with them unto Tarshish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1절에 언급된 아밋대의 뜻은 ‘정직한’이고 요나의 뜻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정의롭다는 말과 맞닿아 있으므로 요나가 정의로움의 아들로서 평화를 전하는 메신저라는 뜻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셨다 했으니 성령을 영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했는데 이 말씀인즉 복음을 전파하는 임무가 주어졌다는 뜻입니다.(2절)

그러나 요나는 말씀을 전하기보다 여호와의 존재로부터(the presence of the LORD) 일어나 도망하기 위해(rose up to flee) 다시스로 향해 욥바로 내려갔다 했습니다.

다시스의 뜻은 ‘금속제련’이고 욥바의 뜻은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가리킵니다.(세상은 영혼을 단련하는 학습장이라는 뜻)

즉, 요나가 성령을 영접했음에도 임무를 무시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취하려 했다는 거지요.

결국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간 지낸 끝에 임무를 완성하게 되지만 이모든 과정이 구도자의 삶을 비유하고 있는 겁니다.

빛이신 성령을 영접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세상 마지막 날까지 정진하며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이행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타의 모범이 되어 구도자의 본분을 지켜야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무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 혼자만 빛이신 성령을 알고 숨어살 것이 아니라 빛으로 세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 요나서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지요.

아마도 누군가는 이 같은 일은 성령을 영접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닌가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으며 이미 성령의 내재하심을 들은 이들 모두는 여기에 해당합니다.

본인의 믿음에 따라 성령의 불씨가 되살아나 활활 타오르게 만드느냐 다시 꺼져버리게 만드느냐는 온전히 자신에게 달렸지만 일단은 성령의 내재하심을 알게 된 것은 분명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생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중요하며 어떤 마음으로 어떤 행동과 말을 하며 지내는지도 중요하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나 영적단체에서 말씀을 듣고 목회 일을 위해 노력하는 일 하나하나는 무척 중요하며 자신영혼을 위해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구도자들을 무척 좋아하며 그들의 노력에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습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 하여도 이미 내적으로 그들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성령이 내재하고 있으므로 진정 성령을 위한다면 서로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일을 가슴깊이 느끼려면 추운 날 화로를 떠올려 보면 됩니다.

바깥에서 추위에 떨다가 불앞에 다가서면 몸이 녹아내리지요.

단 한 번도 불을 본 일이 없는 이라 할지라도 불앞에 다가서면 따스함을 느끼기 마련이며 불이 어떤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정 삶에서 영혼의 안식을 갈망하는 이는 누가 성령의 빛을 발하는지 알기 마련입니다.

성령은 성령을 알아보게 되어있으며 유유상종(類類相從)이고 이심전심(以心傳心)이기에 속이려야 속일수가 없는 겁니다.

일부러 등을 돌리지 않는 이상 누구나가 알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렇지는 않으며 적어도 성령의 내재함을 어렴 풋 이라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바 있지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thou hearest the sound thereof, but canst not tell whence it cometh, and whither it goeth: so is every 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바람이 부는 곳에 귀를 기울이면 그것의 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그러나 그것이 오는 곳을 말할 수는 없고(but canst not tell whence it cometh) 어디로 가는지 말할 수 없다(whither it goeth) 했으며 성령으로 난사람 모두가 그러하다(every 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말하고 있습니다.

바람의 소리를 듣고 바람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바람의 실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막상 성령을 눈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지요.

그렇지만 내재하신 성령은 분명히 알게 되어있으며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러므로 내 눈에는 여러분 모두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성령이 보인다는 말씀을 드리며 득도에 대한 상고의 시간을 마무리 합니다.